허헌(1885 ~ 1951)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활동했다. 그의 아호는 긍인(兢人)이다. 1907년 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에서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변호사로서 그는 일제의 억압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법적 대변인이었다. 특히 3·1 운동 이후 민족대표 33인과 관련자들의 변론을 맡아 항일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허헌은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며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힘썼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 임금 인상 등을 위해서도 무료로 변론하며 사회 정의를 실천했다.
허헌은 독립운동 외에도 교육과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4년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조선인 변호사 회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들의 법적 보호를 위해 계속 활동했다. 또한, 여성 운동에도 기여했으며, 딸 허정숙은 그의 영향을 받아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는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주요 간부로 참여하며 좌우 합작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신간회 활동을 통해 그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지원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단파방송 밀청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서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남조선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로동당 등의 활동을 하던 중 탄압을 받자 1948년 남북협상차 북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허헌은 일생 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51년 청천강에서 익사하였고,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