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주(1859년 ~ 1915년)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인물이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교육자이자 문인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에 저항하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항일 투쟁을 지속하다가, 1915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현주의 대표적인 기록인 *薇山擧義錄*은 1905년, 그가 최익현 선생을 따라 거의 기록을 남긴 저서로서 44장으로 되어 있다.
번역(시작 부분)
광무 을사년(1905년) 10월 21일, 일본의 주요 인물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이끌고 경성에 들어와 대궐을 포위하고, 역적 이지용과 이근택 등의 무리와 함께 우리 황제를 협박하여 보호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했다. 그리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우리 대한의 영토와 백성이 모두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했다. 이에 앞서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우리 정부를 장악하고 경찰청과 법부를 폐지하며, 일본 경찰이 우리나라의 경찰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에 최익현 선생께서 소환을 받아 경연에서 울며 나라를 구할 정책을 간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저로 돌아왔다. 이후 대궐문 밖에 자리를 깔고 엎드려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군인에 의해 구속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협박을 받았다. 이후 선생께서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골에 은거하며 문을 걸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시월의 변란 소식을 듣게 되어 다시 상소를 올렸으나 비답을 받지 못했다. 연재 선생이 대궐로 올라가서 최익현에게 급히 상경하여 함께 일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최익현 선생께서는 상소를 했으나 비답을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나, 다시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상경 준비를 하게 됐다.
최익현 선생께서는 직접 팔도 사민에게 격문을 작성하여 알렸고, 여러 선비들이 서울로 모여 함께 일하려 했으나,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 연재 선생은 결국 섣달 그믐날에 생을 마감했고, 계획은 무산됐다. 이후 임현주 선생께서는 상소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싸우다 죽을 결심을 했다.
병오년 2월 21일에 전 군수 임병찬과 종석산 중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행동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계획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