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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친필 시고

2024년 9월 3일

최남선 (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문화운동가이자 근대 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동안 변절하여 친일파로 활동한 인물로, 종종 이광수와 함께 거론된다.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이며, 본관은 동주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난 최남선은 유년기에 강원도 철원과 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머물렀다.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7년 와세다 대학 재학 중 동맹 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귀국했다.

1908년 이광수와 함께 소년지를 창간했으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여러 잡지를 발간했지만, 모두 조선총독부의 신문지법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최남선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 중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낭독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었으나,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22년, 그는 동명사(東明社)를 설립하고 주간 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였으며,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했으나 자금 부족과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었다. 1927년,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하면서 친일 성향으로 전향해 논란이 되었다.

1957년 10월 10일, 최남선은 뇌일혈로 사망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는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 인물이다.

주요 업적:
–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 잡지인 소년지 창간
–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작사
– 조선광문회를 통해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고전 문헌을 한글로 번역 및 출간
– 3.1 운동에서 기미독립선언문 작성 및 낭독

최남선은 한국의 근대 문학과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지만, 일제 강점기 후반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번역:

서로 구하는 바도 없으니 과시(자랑)하는 바도 없고

흥이 오면 때때로 바다 건너 그대의 집 찾아가네

계수나무 창에 달빛 들어 향기 아로 새기고

걸상 옮겨 매화 가까이 하여 먹 뽑아 꽃 그리네

옛날에 경륜(포부, 계획)을 위해 많이 좇은 날

지금에 글자 새겨서 다시 蒸沙하네

마침내 알겠노라, 만사가 덧없이 그만인 것을

부질없이 누런 정원을 바라보며 푸른 노을을 꿈꾸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