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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 판결로 본 미국의 미술가 보호

2018년 4월 2일

조영남 대작(代作) 사건 등 미술저작권을 둘러 싼 법정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예전보다 이런 소송이 늘어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첫 번째는 미술품의 가격이 폭등하고 거래도 활발해졌으며 대중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미술품 또는 그 이미지 이용 등이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게 되니 분쟁이 많아질 밖에 없다. 두 번째는 현대미술에서는 무엇이 예술인가 하는데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변화하고 어디까지가 미술인지에 대해 규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미술 자체에 대한 논쟁이 커졌다. 게다가 저작권은 철학에 따라 입장이 확연히 다르고 법학 중에서도 까다로운 분야에 속한다. 그러다보니 미술저작권 문제가 생기면 웬만한 법률가들도 결론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논쟁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미술저작권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하고 법정에서 치열한 다툼이 예상된다. 큰 흐름은 미술가의 권리를 보호하는 쪽이지만 개별 사안에 따라 결론은 다르다.

근래 미국에서 주목할만한 판결이 하나 나왔다. 2018. 2. 선고된 그래피티 철거 관련 뉴욕연방법원 판결이다. 이 사건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쟁점은 그라피티가 미국의 시각예술가권리법상 보호할만한 예술에 해당하는가, 작품의 ‘파괴’에 대해서도 동일성유지권을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동일성유지권이란 원래 작가가 그 작품의 내용, 형식, 제호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를 의미하고, 넓게는 작가의 정신세계에 피해를 주는 것, 작품의 완전성에 대해 피해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성유지권은 공표권, 성명표시권 등과 함께 저작인격권에 속하는데 저작인격권이란 저작자가 저작물에 대하여 가지는 인격적, 정신적 권리를 말한다. 저작물의 이용으로부터 생기는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저작재산권과 대비된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미술가의 권리, 그 중에서도 저작인격권을 폭넓고 강하게 보호하는 국가일까? 정답은 때로는 맞고 때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법률이나 판례의 전반적인 경향은 저작인격권으로 보호되는 미술의 범위가 좁고 보호의 수준도 낮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미술의 경우에도 철학적 입장, 그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등이 어떤 보호를 할 지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술품을 작가의 분신이라기 보다는 물건의 하나로 취급하기 때문에 미술가와 미술품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미술품을 작가의 분신으로 보는 저작인격권 개념은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에서 발전했고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19세기까지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경제적 번영을 위해 투자하느라 예술을 즐기고 장려하고 구입하는 데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팝아트 미니멀 아트, 극사실주의 등이 발전하면서 미술활동이 활발해졌고 막대한 부를 토대로 엄청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 발전과 미술의 발전에 힘입어 세계 미술품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1990년 시각예술가권리법(Visual Artists Rights Act, VARA)에서 저작인격권을 처음 도입할 때만 해도 조지 스미스 의원이 “의회에 의해 채택된 사적재산권 중 가장 이질적인 것”이라고 할 정도로 논쟁이 많았다. 도입 초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 발달한 미술에 대해서는 저작인격권을 폭넓고 강하는 보호하는 방향의 판결들이 나오고 있다.

이번 뉴욕연방법원 판결의 사실관계는 퀸스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건축물 ‘5포인츠(5Pointz)’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건물주인 제리 워코프가 그라피티 작품 45개를 훼손한 것이다. 과거 공장 부지였던 5포인츠는 20여 년간 그라피티 예술의 성지로 이름을 떨쳤다. 1993년부터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건물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 등으로 그림을 그려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처음엔 이들의 활동을 허용했던 건물주 워코프가 고급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재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예술가들이 건물 철거에 반대하자 2013년 워코프는 한밤중에 흰 페인트로 그라피티 작품들을 덮어버렸고, 이듬해에는 건물 철거에 들어갔다. 작품을 잃어버린 작가 21명은 2013년 소송을 제기했다. 건물 철거 계획을 사전에 알려줬다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는 등 작품을 살릴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작가의 명예나 명성을 손상할 수 있는 작품의 고의적 왜곡과 훼손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월코프는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건물을 허물 것이란 걸 그들도 알았다”고 항변했다.

시각예술가권리법은 건물에 설치된 시각예술저작물을 그 제거에 있어서 작품의 변경이 필연적인 변경이 수반되는 경우에는 시각예술저작물이 건물이 일체화되거나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서 당해 저작물을 그 건물로부터 제거할 때 저작물의 파괴, 왜곡, 훼손 또는 기타 변경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건물 소유자가 일정한 절차를 밟는 경우 시각예술저작자의 동일성유지권을 제한하도록 하고 있다. 건물의 소유자와 저작자가 당해 저작물이 분리에 의하여 파괴, 왜곡, 훼절 또는 기타 변경될 수 있다고 명시한 문서에 서명하지 않은 경우는 예외이다. 이 법은 모든 미술품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된 지위(of recognized)’를 가진 미술품만 보호한다. 이는 모든 미술품을 보호하는 프랑스나 독일의 입장과는 다르고 실용주의적 미학이론과 관련이 있다. 실용주의적 미학이론가인 산타야나와 에머슨에 따르면 예술 작품의 가치는 독자와 해석자 속에서 생겨나는 경험에서 드러나는 ‘진실’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 경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진실’에 있다. 이러한 사상에 따르면 미술품의 파괴는 후세에 그러한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 시각예술가권리법 입법 당시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미국의 미술가들은 국가 정신의 기록자이며 보존자였다. 시각예술가들은 특별한 작품을 창조한다. 만일 그러한 작품들이 훼손되거나 파손되면 대체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이 사건에서 그라피티가 ‘인정된 지위’의 미술품인지, 즉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미술품인지가 쟁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뉴욕연방법원의 프레더릭 블록 판사는 그라피티에게 ‘인정된 지위’가 있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건물주 제리 워코프에게 작가 1명당 15만 달러, 총 675만 달러(약 73억 원)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블록 판사는 판결문에서 “워코프의 오만함이 아니었다면, 이들 작품의 손상은 헤아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승인을 받을 때까지 5포인츠를 허물지 않고 10개월 후에 철거했다면, 법원은 그가 고의로 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5포인츠는 유명 관광지이므로 당연히 대중은 최후 10개월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몰려들어 이 엄청난 작품을 바라봤을 것”이라며 “이는 예술가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멋진 찬사가 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 판결에서 낙서예술인 그라피티를 법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예술품으로 봐야 한다고 인정한 것은 미국에서도 획기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술가들의 소송대리인인 에릭 바움은 “그라피티가 다른 미술과 똑같이 연방법으로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며 환영했다. 이번 그라피티 판결은 미국이 미술가의 저작인격권을 보호하는 범위와 정도를 넓고 강하게 하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본진(법무법인 로플렉스 대표변호사, 법학박사)

계간조각 201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