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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의 편지: 조선학자의 사명감과 문화 수호의 흔적

2024년 9월 25일

정인보의 편지

정인보(1893~1950 추정)는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초기까지 한국의 대표적 학자이자 역사가, 언론인, 정치가, 문인이었다. 그는 동래 정씨 출신으로, 아호는 위당(爲堂)과 담원(湛園)을 사용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유학에 밝았던 조부와 일가로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양명학의 학풍을 따르던 이건승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08년 16세의 나이로 상해로 건너가 2년간 체류하며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고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이때부터 정인보의 삶은 한민족의 문화와 정체성 보존에 헌신하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귀국 후 1922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국문학과 한문 고전을 가르쳤고,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도 강의하며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그는 다산 정약용, 신채호 등 조선학자들의 사상을 조명하며 한국사와 철학 분야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언론인으로서도 동아일보에 기고하며 날카롭고 소신 있는 비평으로 주목받았고, 시조 창작에도 몰두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사연구』, 『담원시조집』 등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문학사와 사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감사원장을 지냈지만, 이승만 정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1949년 사임하였다.

이후에도 학문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조선 문화의 자긍심 회복에 힘썼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고, 생사는 그해 말로 추정될 뿐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인보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현재 그의 문집은 전집 형태로 간행되었고, 학문적 유산은 여전히 한국 사상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번역문 (Translation):

나는 아버님의 유고를 가리는 일이 의당 내게 맡겨진 의무이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자네가 거듭 청하는 까닭에 더욱 힘써야겠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요즘 내 심신이 몹시 불안하고, 집안 사정 또한 잇따른 병환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기에 일을 날마다 미루었고, 수개월이나 지났건만 초고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네. 이로 인해 이 편지에 동봉하지 못하니 양해 바라고,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한 달 안으로 전념하여 자네의 뜻을 이루어드리겠네.

“애민여기(愛民如己)”라는 네 글자는 누가 청했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이미 말했으니 의당 써서 드리겠네. 총헌(総憲) 직책은 오래전부터 사양하고 싶었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억지로 감당해 온 것이 도리어 혼란만 자초했네. 백성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도 않기에 사표를 내고 집에 머물며 마음이 맑고 홀가분해졌네. 그러나 남쪽의 외진 고을까지 한번도 순시하지 못해, 그 지역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네.

듣자니 백당 선생이 읍 근처로 이사하셨다니, 진주의 형편은 짐작할 수 있겠네. 회봉집은 이미 완성되었다 들었는데, 백당 선생의 마음이 평온하시리라 믿네. 여러 고초를 견디고 이루었으니 오히려 끝이 가까워질수록 기쁨이 크셨을 걸세. 혹시 회봉집 인쇄 이후에 또 다른 일이 있으면 꼭 백당 선생께 전해주게.

등불 아래 급히 쓰느라 빠뜨린 이야기가 많겠지만 차후에 자네가 헤아려주기를 바라네. 부디 모든 일에 몸을 아껴주시게.7월 17일, 정인보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