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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일의 친필 편지

2024년 8월 6일

왕재일은 1904년 1월 19일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6년 9월, 식민지배하의 민족 차별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가지고 동교생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박인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1926년 11월 3일,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최규창의 집에서 왕재일과 그 동지들은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 성진회를 결성했다. 왕재일은 성진회의 총무를 맡았으며, 조직의 운영 방침으로는 월회비 10전을 납부하고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 민족적 교양을 함양하고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 엄수와 동지 포섭을 통해 조직 확대에 힘쓰기로 했다.

그러나 조직 내부에 이반자가 나타나 기밀 누설의 위험이 커졌고, 주동 학생들의 졸업으로 조직 내용의 전환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성진회를 해체했다. 그러나 주동 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경찰은 성진회와 관련된 인물들을 시위의 배후로 지목하여 체포했다. 왕재일 역시 체포되어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출옥 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1년 2월 14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95년에는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