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崔益鉉, 1833년 12월 5일 ~ 1906년 11월 21일)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권력에 저항하며 그를 탄핵한 첫 인물이었다.
1868년 경복궁 재건으로 인한 재정 문제를 비판하며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하며 결국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최익현은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개화와 외세의 간섭을 반대했다.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과의 협상에 반대하며 개항을 막으려 했고,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리더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며 고종과 조선 조정은 서양 열강과의 외교를 추진했고, 이에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유배 생활 중에도 문호 개방과 외세 간섭에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일본과의 협상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리던 시기는 조선이 외교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고, 그는 이를 비판하며 외세를 배척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비분강개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이완용과 같은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며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이미 74세에 달해 있었고, 노구에도 불구하고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다. 결국 일본군에 체포되어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단식을 결심하며 일본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최익현은 일본이 자신에게 서양식 예법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며 의로운 죽음을 결심했다. 결국 그는 쓰시마섬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죽음은 조선 민중과 유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